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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01월16일]주어사/천진암 도보순례

  • 담당자 :오완수
  • 연락처 :1688-6835
  • 이메일 :kbh62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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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행사명 여행기간
이용특전 및 참조사항

   천주교의 발생지라는 천진암 성지와 최초의 강학이 열렸다는 주어사지를 가다.......


 


* 조선 초기 신앙공동체 의 서막

“이냐시오노뇰라”와 그의 동료 6명이 함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언덕 작은 경당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만들어진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주교와 함께 서양의 선진화 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일본을 선교한 후 들어 오면서 청나라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전통적인 철학사상 성리학이 명나라 때 양명학으로, 청나라에서는 다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진실을 구한다는 실사구시의 고증학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금석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에서는 천주교의 전래로 백성들의 의식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봉건사상에서 차츰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신앙이 밑바닥 민중들 사이에 움트게 되고, 천주교는 서학(西學)의 이름으로 곧 조선에 전래되었다. 서학은 천주학(교)과 서양과학사상을 의미한다.
이 서학으로 인해 후기 조선시대 한 획을 긋는 정약용의 생애는  정씨 가문의 멸문지화(가문이 사라지는 재난, 반역의 죄를 지으면 당 한다)를 가져오고, 조선사회 전반에 걸쳐 큰 충격을 주게 되는 사건이 예비되고 있었다.

스물세 살 때인 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고자 고향을 찾았다. 여덟 살이 많았지만 친구인 이벽도 왔다. 큰 형수의 동생이었으므로 누님의 제사에 참석하고자 정약용의 집에 온 것이다. 멸문지화가 일으나는  시작은 제사를 마친 뒤 상경하는 뱃길에서 잉태되었다.
정약용에게 성호이익 선생이 한 세대 전의 스승이었다면 이벽은 살아 있는 벗 이며 학덕 높은 지우였다
형수의 제사를 지낸 정약용은 둘째형 정약전 그리고 이벽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배안에서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얘기를 듣는다.
날카롭고 굳센 정신과 적극적인 기세가가 왕성한 정약용은 이때 처음으로 서학에 대해, 새로운 학문의 세계와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통유학과 성리학 그리고 성장하면서 성호학파의 실학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던 그에게 서학은 문화충격이었다.

조선에서는 18세기 연경(북경)을 거쳐서 간간히 서구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아정 이덕무, 초정 박제가, 혜풍 유득공 등이 정사 혹은 수행원의 자격으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새로운 청나라 문화ㆍ문명이 소개되고, 이들을 통해 서학이 묻어왔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학파가 형성되었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조선왕조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들을 호족ㆍ만족ㆍ오랑케라 멸칭하면서 북벌론이 국시처럼 되었고 겉으로 대우하는 것처럼 하지만 청나라는 100년이 안되 망 한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던 청국이 '3대 중흥기'를 거치면서 문화적 융성을 이루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신비한 현상이고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천주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틈에 끼어 천주교도가 조선땅에 들어온 적이 있다고 하지만 전교하지는 못하고, 이후 이수광ㆍ허균ㆍ유몽인 등에 의해 내용의 일부가 소개되었으며, 1784년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이 그의 아버지 이동욱의 수행원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왔다. 이승훈에 의해 이벽ㆍ권철신ㆍ권일신ㆍ이가환 등 남인 소장파 중심으로 한국천주교회의 공동체가 만들어 지고 마침내 정약용 형제들에게 까지 소개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의 불씨가 뿌려진 셈이다.

정약용은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벽을 송대 시인 소동파(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에 견주어 덕을 높이는 시를 지었다. 그에게 이벽은 높이 받드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포함사항
불포함사항
유의사항
운동화 또는 등산화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